영화 <다음 소희>는 특성화고등학교에 다니는 소희의 이야기를 통해 교육과 사회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다.
소희는 졸업을 앞두고 대기업 하청업체인 콜센터에 실습을 나가게 된다.
그러나 이 현장 실습은 소희에게 불행의 시작이었다.
특성화고등학교의 현장실습은 학생의 노동을 착취하는 수단이었다.
회사는 소희에게 부조리와 부당함에 눈을 감게 하고,
'적응'하라고 한다.
결국 불공정한 사회적 구조에 직면하게 된 소희는 그 안에서 무력함을 느끼며 극단적인 선택에 이른다.
이후 영화는 소희의 죽음의 이유를 수사하는 형사 유진의 이야기로 전환된다.
유진은 소희의 죽음의 이유에 대한 수사를 하며 불공정한 시스템을 파헤치며 권력의 통제와 사회적 구조의 문제를 드러낸다.
소희가 일하는 장소는 파티션으로 구획 지워진 똑같은 책상과 의자가 빽빽하게 나열되어있어 장소조차도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한다.
이런 공간은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언제든 대체 가능한 존재"에 대해 말하는 것 같다.
관리자는 소희를 언제나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장소이다.
그 장소는 목적 없이 열정적으로 춤을 추며, 곱창집에서 친구를 향한 비방의 목소리에 당차게 따지고 드는 소희라는 존재를 지운다.
소희가 일하는 콜센터 팀의 팀장은 아이들을 착취하는 것에 대해 양심적인 압박을 받고 고통스러워하며 결국 자살을 하지만 언제나 대체 가능한 그들은 그것에 대해 함구해야 한다.
즉 그들은 거기에 있지만 거기에 있지 않아야 한다.
춤추는 것을 좋아하던 소희가 왜 춤을 췄는지 아무도 모른다.
꿈과 열정을 가진 소희는 현장실습을 통해 소외와 상실감, 무력감을 느꼈을 것이다.
같이 일하던 팀장이 자살을 했을 때도 일을 해야 했고,
아들이 죽었다며 서비스 해지를 요청하는 고객의 요구를 막아야 했다.
그러나 파티션으로 나누어진 사무실의 어느 자리에서, 어제와 다름없이
"사랑합니다. 고객님" 이라고 시작하는 말을 뱉어내야 했다.
소희가 경험한 것은 자신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의문과 불확실성이었다.
하지만 이런 소희에게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힘든 일을 하면 존중받으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을 한다고 더 무시해."
소희의 죽음에 대해 조사를 하던 형사 유진은 이렇게 말한다.
"힘든 일을 하면 존중받으면 좋을텐데, 그런 일을 한다고 더 무시해."
소희와 소희의 친구들은 특성화고등학교에 다니고,
집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무시당해도 되고 착취하고 억압하는 것이
'가능한'아이들이다.
영화에서 비추고 있는 교육 시스템의 권력과 경쟁구조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특성화고등학교와 콜센터에서의 경쟁과 성과 중심의 평가체계는 개인의 존엄성과 자기실현을 무시하고 성과와 경쟁을 중시하는 사회의 단면들을 보여주었다.
권력은 인센티브를 통해 규범과 질서를 만든다.
소희는 회사에서 인센티를 위해 경쟁하고, 소희가 다닌 학교는 다른 학교들과 인센티브를 위해 경쟁한다.
그래서 이 사회의 질서와 규범 안에서, 즉 인센티브에 의해 경쟁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
숫자와 성과를 기준으로 개인의 가치를 측정하고 평가하는 시스템이 뼈 때리는 현실이다.
언제나 숫자로 나타나는 결과를 강조하며 배제와 차별이 발생하고,
이로 인한 압박과 경쟁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학생이 일하다가 죽었는데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유진의 분노에 교육청 장학사는 이렇게 말한다.
"적당히 하십시다. 그래서요? 이제 교육부 가실랍니까? 그다음은요?"
소희의 비극은 분명 사회적 구조와 시스템 안에 있다.
그러나 개인의 고통과 죽음이 사회적인 구조의 책임 속에서 잠식되고 처참하게 무시된다.
교육은 고유한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며 자기실현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학교에서 실습을 보낸 그곳은 언제든 교체 가능한 인간이 경쟁을 통해 성과를 지향하는 곳이었다.
"선생님은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세요?"라며 힘들어하는 소희에게 담임선생님은 학교와 후배들을 위해 버텨주실 종용 한다.
그리고 선생님이 아는 소희는 잘 해낼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후 소희는 죽음을 선택한다.
소희가 경험한 것은 소외됨과 상실감, 무력감이었을 것이다.
나도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말을 자주 한다.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기대와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한다는 것이 어쩌면 피상적이고, 섣부르고, 으레 그러해야 하는 관행과 같은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섣부르고, 피상적이고 관행과 같은 한 마디는 소희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말이었다.
교사의 기대와 격력은 늘 적당한가?
교사는 응당 학생들에게 긍정적인 동기부여와 성취감을 주어야 하며 자신감과 도전 의식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당연시했던, 관행적으로 행했던 행태로부터 벗어나 아이들이라는 존재에 대해 윤리적 책임을 느끼며 응시해야 한다.
교육은 무엇을 해야 하나?
'적당히 하십시다.'라는 장학사의 말은 적당히 하면 안 된다는 말처럼 들린다,
교육청, 학교와 선생님이 인센티브가 만들어 놓은 규범과 질서에서 빠져나와 다음 소희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한다.
'적당히'가 아니라 소희가 춤을 출 때처럼 열정적으로, 맹목적으로 소희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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